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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 민영환의 만장(輓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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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001회 작성일 21-01-12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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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은 대한제국 말 외척 정치의 핵심이던 여흥 민씨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 백부(伯父) 민태호의 양자(養子)로 입양되었다. 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가 고모여서 고종의 외사촌이었고, 중부(仲父) 민승호가 민비의 부친 민치록의 양자여서 비록 피를 잇지는 않았지만 명성황후의 조카였다. 민영환은 20대가 되었을 때 선혜청 당상인 생부 민겸호가 임오군란(1882년) 와중에 척살되고 양부(養父)가 갑신정변(1884년) 때 개화당 청년들에게 살해되는 개인적인 비극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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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그 무렵 민영환은 여러 관직을 거쳐 당상관(1881년), 현재의 국립대 총장격인 정3품 성균관 대사성(1882년)에 오르는 등 민씨 가문의 후광에 힘입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생부와 양부의 죽음 후에도 이조참판, 예조판서, 병조판서 등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1895년 을미사변 직전에는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되었으나 민비의 시해로 부임하지는 못하고 낙향했다.

고종의 친정 이후 22년간 유지되어온 민씨의 세도정치는 민비의 죽음과 민영환의 낙향으로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 그래도 민영환은 고종의 두터운 신임 덕에 두 차례나 세계를 순방했다. 첫 번째는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축하 특명전권대사로 파견된 해외 순방이었다. 학부협판 윤치호가 영어 통역을 전담했다.
특사단은 1896년 4월 1일 인천 제물포를 출발해 군함·상선·열차 등을 갈아타며 상하이~요코하마∼벤쿠버∼뉴욕∼런던∼베를린∼바르샤바 등을 거쳐 5월 20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민영환은 대관식에 참석한 뒤 3개월 동안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며 러시아 관리들과 군사교관 파견, 차관 교섭, 고문관 파견 등을 논의했다.
민영환이 이르쿠츠크∼바이칼호∼블라디보스토크∼부산∼인천을 거쳐 서울로 돌아온 것은 10월 21일이었다. 장장 6개월 20일 동안 민영환이 거쳐간 나라만 11개국에 달했다.
귀국 후에는 군부대신에 임명되어 조선군의 신식훈련에 박차를 가하다가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유럽 6개국의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1897년 3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축하식에 참석하라는 특명을 받았다.
민영환은 3월 24일 인천을 떠나 상하이∼나가사키∼홍콩∼오데사항(흑해)∼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 6월 5일 영국 런던에 도착,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7월 17일 귀국했다.
민영환은 두 차례 해외순방을 하며 각국의 정치·경제·문화·사회·교육·군사상의 발전 등을 눈여겨보았다. 이를 통해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을 신장시켜 국가의 근본을 공고히 할 것을 수차례 고종에게 건의했다. 고종이 참모본부에 해당하는 ‘원수부’를 설치한 것도 민영환의 건의가 있은 뒤였다.
민영환은 원수부의 회계국 총장으로 재직하며 군악대 설치와 국가·어기 제정을 추진했다. 그가 군악대의 음악교사로 1900년 12월 초빙한 독일인 에케르트가 1902년 대한제국의 국가(國歌)를 제정하고 그해 3월 황태자 탄신일에 국가를 연주하게 된 데는 이처럼 민영환의 공이 컸다.
민영환은 해외이민사업의 필요성도 절감했다. 1902년 11월 '수민원'을 설립하고 총재를 맡아 2년간 7,800여 명의 이민자를 하와이로 보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후에는 내부대신과 학부대신으로 활동하면서 친일 각료들과 대립하다가 한직인 시종무관장(경호실장)으로 밀려났다. 그래도 반일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5년 7개월 간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이승만에게 고종의 밀지를 주어 1904년 11월 미국으로 떠나게 한 것도 민영환이었다. 이승만은 미 정부를 상대로 조선의 독립을 도와달라는 외교청원운동을 벌였으나 당시 미국은 이미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민영환의 구국외교는 무위로 돌아갔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 2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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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

민영환이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들은 것은 경기도 용인이었다. 곧 서울로 올라와 전 좌의정 조병세와 함께 대책을 논의했다. 조병세는 고령으로 낙향했다가 소식을 듣고 79세 노구를 이끌고 상경했다. 두 사람은 11월 27일 조병세를 소두(疏頭·상소문에서 맨 먼저 이름을 올린 사람)로 하고 백관이 연명한 상소문을 가지고 궁궐로 들어가 을사오적의 처형과 조약 파기를 호소했다. 일본 헌병들이 달려와 조병세는 체포하고 민영환을 비롯해 백관들은 강제 해산했다. 민영환은 굴하지 않고 자신이 소두가 되어 거듭 상소를 올리며 궁궐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11월 29일 체포되었으나 고종의 배려로 당일 석방되었다.
민영환이 약해진 몸을 추스르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위해 찾아간 곳은 서울 공평동에 사는 의관 이완식의 집이었다. 주위 사람들을 물리친 뒤 문을 잠그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상소를 계속 올린다고 해서 성과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맞선다고 한들 국권을 회복하는 것도 무망해 보였다. 결국 죽음으로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백성에게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겠다며 비장한 결심을 했다.
민영환이 단도로 자신의 배를 찌른 것은 11월 30일 아침 6시쯤이었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다음 날 시신에 수의를 갈아입히려고 할 때 옷소매에서 서구식 명함(6x9.2cm) 앞뒷면에 한자로 깨알같이 적어놓은 유서 몇 장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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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의 자결유서

〈訣告我大韓帝國二千萬同胞〉
嗚呼,國恥民辱乃至於此,我人民將且殄滅於生存競争之中矣。夫要生者必死,期死者得生,諸公豈不諒只。泳煥徒以一死仰報皇恩以謝我二千萬同胞兄弟。泳煥死而不死期助諸君於九泉之下,幸我同胞兄弟千萬億加奮勵,堅乃志氣勉其學問,決心戮力復我自由獨立即死子當喜笑於冥冥之中矣。鳴呼,勿少失望。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에서 모두 진멸 당하려하는 도다.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니, 여러분이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임금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기필코 돕기를 기약하니,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억천만배 더욱 기운 내어 힘씀으로써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여 그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저 어둡고 어둑한 죽음의 늪에서나마 기뻐 웃으리로다.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라.
한 장은 “영환은 죽어도 아니 죽는다(死而不死)”면서 백성들에게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는 유서였고 나머지는 청국·영국·미국·프랑스·독일 공관 앞으로 보낸 유서 겸 편지였다.

민영환이 자결하자 을사늑약에 서명한 하야시 곤스케 일본 공사를 비롯한 각국 공사들이 빠짐없이 조문을 했다. 신분의 구분 없이 남녀노소 모두 영전에서 곡을 했다. 고종도 한참동안 목 놓아 울었다.
민영환의 순국은 백성들의 추모열기와 반일의식을 부추겼다. 5번이나 상소를 올린 의정부 참찬 이상설은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맨상투에 흰 명주 저고리만을 걸친 채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국가와 백성을 이 지경에 빠트렸으니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며 땅에 머리를 내리찧었다. 유혈이 낭자한 현장에는 민영환의 집에 조문 갔다가 나온 백범 김구도 있었다. 김구는 이상설의 자살 미수사건을 백범일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어떤 사람이 흰 명주저고리에 갓망건도 없이 맨상투 바람으로 옷에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채 여러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인력거에 실려 가면서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누구냐고 묻자 참찬 이상설인데 자살 미수에 그쳤다고 한다.”
고종은 민영환에게 정1품 대광보국 숭록대부 육군대장 의정부 의정대신의 관작을 추증하고 ‘충문(忠文)’을 시호로 내렸다. 새로 제정된 근대식 서훈에 맞춰 최고 훈장을 추서했다. 고종의 은전은 자신의 통분한 심정과 일본에 대한 저항을 드러낸 것이다.
민영환이 자결한 이튿날, 함께 상소를 올린 조병세가 극약을 먹고 자결했다. 같은 날 전 참판 홍만식도 자결하고 학부 주사 이상철, 평양진위대 군인 김봉학 등 각계각층에서 순국이 이어졌다. 민영환의 집 행랑에 거처하던 인력거꾼은 뒷산에서 소나무에 목을 매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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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혈죽(血竹)을 찍은 사진

민영환이 순국한 1905년 11월 30일 이후 약 250일이 지나서 1906년 7월 4일에 혈죽 자생 사건이 일어난다. 사건인 즉 그가 자결할 때 사용했던 칼과 피 묻은 옷을 집안의 방 마루에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부인 박씨가 그 옷을 볕에 말리기 위해 방으로 가보니 새 죽순이 그 하의에 돋아나 있었다고 한다. 그 죽순은 네 개의 떨기에 아홉 개의 줄기가 있었으며 가늘기는 벼 마디와 같고, 뿌리와 줄기는 실과 같이 가늘어 겨우 대나무 모습을 이루고 있었으나 너무 약 하여 부지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바로 다음날인 1906년 7월 5일자 신문 언론을 통해 전해지게 되었다.
이후 대나무는 민영환의 피에서 자라났다고 ‘혈죽(血竹)’으로 명명되었고, 민영환의 자택에는 혈죽을 구경하고 그의 넋을 기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문인 학도들도 시를 짓고 노래를 지어 민영환의 충절을 되새겼다. 박은식도 ‘혈죽기편’을 지어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 민영환의 가족은 혈죽을 광목천에 싸서 다락방에 몰래 보관하다가 1962년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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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이 보관해오다 1962년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한 혈죽

이후 그의 충절을 기려 나라에서는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주어졌다. 민영환의 의로운 순국이후 약해져가던 민족정기가 자주독립을 향한 충정으로 혁신되어 민족의 혼을 불태웠다.

하루는 한 성도가 여쭈기를 "민영환이 나라를 위하여 자결하였는데 벽혈이 나오고 그 자리에서 청죽이 생겨났다 하니 이는 어떤 연고입니까?" 하거늘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민영환이 나라를 위하여 의롭게 죽었으므로 내가 혈죽을 내려 그의 충의를 표창하였느니라."하시니라.

- 道典 5편 140장 -


그 당시 신문은 혈죽사건의 내용과 충정을 기리는 문인들의 시로 기사를 썼는데 마룻바닥에서 솟아나온 혈죽이 민영환의 충정을 기렸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한 성도가 청죽질문에 상제께서 직접 혈죽을 내리시어 충의를 세상에 알렸다는 내용이다.
또 상제께서 김자현에게 말씀하시기를 그의 방이 후에 반드시 약방이 되리라고 일러주시고 민영환(閔泳煥)의 만장을 지어 그에게 주고 「쓸 데 있으리니 외우라.」고 하시니 그 글은 다음과 같으니라.

대인 보국 정지신(大人輔國正知身)
마세 진천 운기신(磨洗塵天運氣新)
유한 경심 종성의(遺恨警深終聖意)
일도 분재 만방심(一刀分在萬方心)

이라 하시고 「일도 분재 만방심(一刀分在萬方心)으로써 세상의 일을 알게 되리라.」 고 일러주셨도다.

 - 典經 예시 37 -


대인이 나라를 돕는 것은 몸을 바르게 아는 것이다.
묵은 하늘을 갈고 씻어서 새로운 운수(運數)로 하였다.
한(恨)이 남는 것을 깊게 경계하여 성부의 뜻을 마친다.
한칼로 나누는 것은 만방심(萬方心)에 있다.

김자현에게 그의 방이 후에 반드시 약방이 되리라고 일러주시고 민영환(閔泳煥)의 만장을 지어주셨다. 전체적인 핵심 단어는 약방이 되리라는 글이다. 그러므로 민영환의 만장(輓章)에는 약(藥)을 암시 하는 글을 내포하고 있다. 상제께서 대병과 소병의 약(藥)을 만드셨는데 그 약이 김자현의 약방에 있다는 말씀이다.

상제께서 말씀하신 약을 다른 경전에서 찾아보자.
객망리(客望里)에 계실 때 종숙(從叔(然會))에게 시루산(甑山)을 가리켜 일러 가라사대 “시루산은 선인연달혈(仙人煉丹穴)이 있어서 장차 천하녹지사(天下祿持士)들이 모일 곳이라. 선약(仙藥)을 구우려면 사물약재(四物藥材)가 있어야 하리니, 가마골의 솥(鼎)과 용화동 용담수(龍華洞 龍潭水)와 죽산(竹山) 박달(朴達)나무와 금산사(金山寺) 불(火)기운이 들어와서, 그 진액(津液)을 모아 공(功)을 들여야 선약(仙藥)으로 쓰일 것이니, 사물탕팔십첩(四物湯八十貼)은 소병지약(小病之藥)이니라”하시니라.

- 대성경집 대순전경 7장 26 -


대병지약은 팽창을 의미하고, 소병지약은 수축을 의미한고 했다. 봄과 여름은 팽창으로 발전하므로 커져가는 의미인 대(大)라고 했으며, 가을과 겨울은 만물이 수축으로 발전하므로 작아지는 의미인 소(小)라고 한 것이다. 봄과 여름은 팽창을 하므로 대병지약되고, 가을과 겨울은 수축을 하므로 소병지약이 된다. 또 팽창을 하는 대(大)에는 천(天)이 있고, 수축을 하는 소(小)에는 지(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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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은 복희팔괘도 이다. 이 그림에서 보면 천(天)은 봄과 여름인 대(大)에 있고, 지(地)는 가을과 겨울은 소(小)에 있다. 천지에 춘하추동이 배정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사물약재(四物藥材)는 춘하추동(春夏秋冬)으로 변화해가는 4가지를 말하며, 약(藥)은 여기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상제께서 “스물네 가지 약종만을 잘 쓰면 만국의원(萬國醫員)이 되리라” 하신 연유도 스물네 가지 약종이 24절후를 말하며, 24절후에는 4철이 있으므로 4철이 사물약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춘하추동(春夏秋冬)에 배치된 사물약재가 약방에 있다는 뜻이고 그 약방이 자현의 방이다. 그러므로 자현의 방에 있는 사물약재(四物藥材)가 선약(仙藥)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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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春)과 하(夏)는 천(天)이므로 대병지약이 되고, 추(秋)와 동(冬)은 지(地)이므로 소병지약이 되는 것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다. 하늘은 삼원(三元)이고, 삼원(三元)의 배정은 중앙과 춘하(春夏)로 배정 할 수가 있고, 땅은 이원(二元)이므로 추동(秋冬)으로 배정이 된다. 이것을 상제께서 말씀하신 약재로 배정을 해보면 아래 그림과 같다. 중앙에서 동남(東南)으로 배정된 약재가 삼원(三元)인 천(天)이 되고, 서북(西北)으로 배정된 약재가 이원(二元)인 지(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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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을 보면, 사물약재인 솥과 박달나무와 불기운과 용담수가 춘하추동(春夏秋冬)으로 배치됨을 알 수 있다.  즉 약이 완성이 되었으므로 자현의 방이 후에 반드시 약방이 되리라고 하신 연유가 자현의 방에는 사물약재가 다 갖추게 된다는 내용이다. 상제께서 태을주를 묻는 공사에서 보면, 자현이 먹을 집은 것을 알 수 있다. 먹이 북쪽이 아닌가? 모든 약이 모이는 곳이 북쪽 겨울인 용담수(龍潭水)이다. 그래서 ‘성사 경주용담 의통(聖師 慶州龍潭 醫統)’이라 하시었다. 의통(醫統)이 춘하추동(春夏秋冬)이 모이는 곳이 된다. 이것을 도(道)라 하셨던 것이다.

어느 날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절후문(節候文)이 좋은 글인 줄을 모르고 있나니라. 시속말에 절후(節候)를 철이라 하고 어린아이의 무지 몰각한 것을 철부지라 하여 어린 소년이라도 지각을 차린 자에게는 철을 안다 하고 나이 많은 노인일지라도 몰지각하면 철부지한 어린아이와 같다 한다.”고 말씀하셨도다.

- 典經 공사3장 34 -

철부지는 철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사철의 변화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사철이 약이 되지만은 지금 우리가 어느 철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면 이것 또한 철부지가 된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가야할 철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도(道)이다.
그러면 다시 민영환에 대해서 알아보자. 상제께서 우리나라를 일본으로 넘기신 이유는 천하를 오선위기(五仙圍碁)로 하여 후천선경세상으로 이끌어 가고자함이었다. 조선의 신명을 서양으로 보내어서 천하를 다섯 신선이 바둑을 두는 형국으로 하시고자 일본에게 이 나라를 맡기는 공사를 보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에 들어와서 식민화를 위해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統監府)와 이사청(理事廳)을 두어 내정(內政)을 장악하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집행한 것이었다. 이것에 반발한 민영환은 나라가 일본에게 넘어가는 것을 비통해 하며 자결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에 대한 해원공사였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조선에 와서 맺은 원한을 ‘삼한당(三恨堂)’이라하시면서 이것을 푸시기 위한 공사였다. 상제님의 의중을 알 턱이 없는 민영환은 자결을 한 것이며, 상제께서 가슴아파하시며 만장을 지으신 것이다.
첫 구절이 민영환의 자결을 두고 하신 내용이다. 나라를 도우려면 몸을 먼저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결로서 충정을 하면 안 된다는 꾸짖는 글이다. 이글을 약방의 내용과 같이 비추어 생각해 보면, 몸을 바르게 알라는 의미는 비단옷을 입어 신선이 된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다. 그래서 반드시 약방이 되리라고 하신 것이다. 이 약이 바로 선약(仙藥)이기 때문이다.
또 한(恨)이 남지 않게 경계하며 천지공사를 마친다고 글을 적으셨다. 당연히 성의(聖意)는 상제님의 뜻이다. 상제님의 천지공사가 이 땅에 선경세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묵은 하늘을 씻어 새롭게 하신다고 하셨다. 또 한(恨)이 남지 않게 하는 것을 경계하셨다. 이것이 해원(解冤)이다. 모든 군생만물이 해원을 해야 하고 한(恨)이 남지 않게 하는 것이 해원상생(解冤相生)의 대의이다. 상제께서 오선위기로 천하를 돌리신 것도 천하를 선경세상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천하를 해원시키고자 함이었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일을 알게 되는 일도분재만방심(一刀分在萬方心)을 적으셨다. 무엇을 한칼로 나눈다는 말씀이실까?
이것은 선천과 후천을 나누어서 선천의 모든 것을 소멸한다는 뜻으로 일도분(一刀分)을 먼저 이해를 해 보자. 해자난분(亥子難分)이라고 하신 이유도 亥와 子를 나누기가 어렵다는 의미이고, 나중에는 해자분(亥子分)을 하신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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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역팔괘도

이 그림에서 보면 해(亥)에서 이곤지(二坤地)인 극락정토가 시작이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선천이 시작되는 자(子)와 후천이 시작되는 해(亥)를 나누는 것이다. 일도분(一刀分)을 하는 것은 후천의 세상이 비단옷으로 갈아입는 세상이기 때문에 선천과 나누는 것이다.
신선이 되려면 신명과 사람이 하나로 조화되어야한다. 천강(天降)인 선약이 있어야 신선이 됨은 말할 나위없다. 신선이 될 수 있는 곳은 신명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곳이고, 이곳이 마음이다. 이것을 만방심이라고 하신 것이다. 일도분재만방심(一刀分在萬方心)이 천하창생에게 비단옷을 입히는 것이고, 지상에 신선이 출현하는 의미이다. 상제께서 신명으로 하여금 사람의 뱃속에 출입케 하여 그 체질과 성격을 고쳐 쓰신다고 하신 연유가 여기에 있다. 배가 땅(地)이고, 이곳에서 후천이 시작되고 또 비단옷을 입으므로 일도 분재 만방심(一刀分在萬方心)으로써 세상의 일을 알게 되리라고 하신 것이다.
도주께서 ‘내가 오로지 구하는 바에 무량하고 지극한 보배가 있으니, 지극한 보배가 다름 아니라 나의 심령(心靈)이로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지극한 보배인 심령을 통할 길이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오지심령임상재지임의(吾之心靈任上宰之任意)’라고 하신 것이다. 즉 심령의 문을 상재(上宰)의 임의에 맡긴다고 하시었다. 상재(上宰)는 상제(上帝)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재상(宰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제께서 ‘안위대신재 하필누장류(安危大臣在 何必淚長流)’ 이라 하시었다. 편안하고 위태로움은 대신(大臣)에게 있는데 어찌하여 눈물을 길게 흘리는가? 여기서 대신(大臣)이 상재(上宰)이다.
장류(長流)가 풍류(風流)를 나타내고 있다. 손풍(巽風)이 장풍(長風)이고, 장류(長流)이다. 상제께서 ‘장풍팔우기동구(長風八隅氣同驅)’라고 하시었다. 장풍은 팔방의 모퉁이 기운을 한가지로 몰아온다. 장풍은 풍류이고, 풍류는 신선의 바람이다. 팔방의 기운을 신선의 바람으로 몰아간다는 의미이다.

아래의 그림은 심령신대(心靈神臺) 해부(亥符)를 나타내는 현무경의 물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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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혼칠백을 오원의 원리로 해서 천하창생에게 비단옷을 입히시겠다는 그림이다. 그래서 심령신대를 적어놓으셨다. 해자분(亥子分)을 하려면 칼로 나누어야 한다. 그러므로 뾰족한 칼을 그림에 그리셨다. 한 칼로 나누어서 시작하는 곳이 해(亥)가 되므로 이 물형을 해부라고 한 것이다.
민영환이 한 칼로 목숨을 끊었지만 상제께서는 한칼로 천하창생을 신선으로 하시겠다는 공사의 내용이 만장에 녹아 있다. 약방이 되리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첫 구절이 대인보국 정지신(大人輔國正知身)이다. 지금까지 인간은 생로병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육신에서 비롯된 선천의 법칙은 항상 인간의 행동에 제한 적이었다. 이것을 상제께서 정지신(正知身)이라 하신 것이다. 이제는 완성이 되는 신선으로 살아간다는 의미가 함축하고 있다. 이것을 바로 알라는 뜻이다. 이러한 일은 대인이 하신다는 내용도 함축되어 있다. 대인이 몸을 바르게 아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하신 내용이다.
또 ‘이목구비 성리대전 팔십권 진묵대사 총명도통’이라 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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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을 체득하는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사관(四官)이다. 이것을 사방으로 그려보자. 중앙은 마음으로 모두가 연결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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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대전 팔십권은 인간이 완성되는 신선의 모습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이것을 진묵대사가 깨달으신 것이다.
상제께서 철도선을 그리시고 가운데에 점을 찍으려다가 몇 번이나 망설이더니 대흥리로 떠나실 때에 그 점을 치시고 “이 점이 되는 때에 세상일이다 되느니라”고 하시었다. 중앙이 기해(己亥)이다. 기유(己酉)에서 시작된 포교오십년공부가 기해(己亥)에서 끝이 난다. 그래서 ‘일입유(日入酉) 해자난분(亥子難分)’이라 하시었다.

육신이 거듭 태어나서 신선으로 화(化)하려면 팔십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덕포어세인기어인(德布於世人起於寅) 복중팔십년신명(腹中八十年神明)이라고 하시었다. 왜 팔십이 되어야 하는가?
하늘은 63이요, 땅은 72요, 사람은 81이다. 하늘에 신명을 봉했을 때가 63이요, 땅에 신명을 봉했을 때가 72요, 이제 사람에게 신명을 봉하므로 81이 된다. 이것이 성리의 대전 80권이다. 성(性)은 본성을 말하며, 온전한 성이 육신으로 나오는 것이 팔십이다. 그러므로 사물탕 팔십첩이 소병지약이 되는 이유이다. 즉 신선이 되는 약이다.
상제께서 이 땅에 선운(仙運)을 여신다고 하시었다. 또 “나의 일은 여동빈(呂洞賓)의 일과 같으니라. 그가 인간의 인연을 찾아서 장생술을 전하려고 빗장사로 변장하고 거리에서 ‘이 빗으로 머리를 빗으면 흰머리가 검어지고 굽은 허리가 곧아지고 노구가 청춘이 되나니 이 빗값은 천 냥이로다’고 외치니 듣는 사람마다 허황하다 하여 따르는 사람이 없기에 그가 스스로 한 노구에게 시험하여 보이니 과연 말과 같은지라. 그제야 모든 사람이 서로 앞을 다투어 모여오니 승천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었다. 민영환이 칼로 자결을 한 것에 대한 만장이 신선의 세상으로 바꾸신다는 글이다. 천하를 오선위기하여 남북으로 3.8로 갈라놓으신 것도 지상(地上)에 신선(神仙)을 실현하시는 천지공사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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